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해군 (문단 편집) ===== 초중반의 선전 ===== [[파일:Ramberg_-_Bombarding_of_Ancona,_1915,_HGM,_2017-03-08.jpg]] ▲ 1915년 이탈리아 중동부 해안의 [[안코나]] 시를 포격하는 오헝 제국 함대.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헝 제국 해군은 아드리아해에 고립되고 말았다. [[협상국]] 해군 전부가 오스트리아를 잡겠다고 아드리아해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. 이탈리아와 알바니아를 잇는 [[오트란토 해협]]에는 협상국 해군 함대의 봉쇄망이 깔렸다. 전쟁 시작 직후 [[프랑스 제3공화국|프랑스]]는 오헝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노출된 지중해 식민지들을 지키기 위해 전 함대를 지중해로 보냈다. 강대한 [[영국 해군]] 또한 지중해 함대를 보내어 이집트와 수에즈를 보호하고자 했다. 영국 지중해 함대에는 3척의 [[순양전함]]이 있었고, 프랑스 해군은 22척의 전드레드노트급과 3척의 드레드노트급 [[전함]] 전체를 지중해로 보내버렸기 때문에, 오스트리아는 오트란토 해협 안으로 대피하는 수밖에 없었다. 1915년부터는 기존의 [[영국]]-[[프랑스]] 함대에 더해 새로 선전포고를 한 [[이탈리아 왕국]]도 가세했다. 독일 해군은 북해에서 영국을 상대로, 오스만 제국 해군은 주로 흑해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활동했으므로 오스트리아는 협상국 연합함대와 사실상 홀로 맞서야 했다. 전쟁 초기에는 이 중에서도 주로 [[프랑스 해군]]이 주적이었다. 하지만 협상국 함대 또한 황립해군이 지키는 아드리아해 내부로 침투할 여력은 되지 않았다. 아드리아해는 매우 좁은 바다였고, 오헝 제국 해군의 근거지가 있는 [[달마티아]] 해안은 서부 이탈리아 연안과 달리 높은 [[디나르알프스 산맥]]과 굴곡진 [[리아스식 해안]]에 보호받고 있었다. 오스트리아 영해에 접근한 협상국 해군 군함들은 이 미로 같은 해안선에 숨은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함대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. 거기다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오면 섬과 섬 사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[[어뢰]]를 쏘고 다시 사라지는 오헝 제국 해군 [[어뢰정]]과 [[유보트]]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. 전쟁 초에 협상국, 특히 프랑스 해군이 입었던 주요 함선 손실들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달마티아 해안에 근접하다 뇌격당한 케이스였다. 그렇기에 최고사령관 [[안톤 하우스]][* [[슬로베니아인]]이다.] 대장이 이끄는 제국 해군은 [[현존함대]] 전략을 기본 방침으로 세우되, [[유보트]] 전력으로 협상국을 타격하는 전술로 전환하였다. 오헝 제국 해군 유보트 함대와 지원 나온 [[독일 제국 해군]] 풀라 잠수함 전단[* 잠수함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, 기차에 실어 지중해까지 옮길 수 있었다.]은 오트란토 해협에 깔린 순찰선들과 대잠망들을 회피해 지중해로 나와 통상파괴전을 실시했다. 특히 영국과 프랑스 해군 전력이 [[갈리폴리 전투]]를 지원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향하자 해협의 경계도가 떨어졌고, 이는 [[동맹국]] 해군에 있어서는 좋은 기회였다. [[파일:An_Austrian_Submarine_sinking_an_enemy_steamer,_during_World_War_I..jpg]] ▲ 협상국 수송선을 격침한 오헝 제국 해군 [[잠수함]]. 미국 디자인을 바탕으로 헝가리의 피우메에서 건조된 U-5 함은 1915년 초 프랑스 해군 장갑순양함 레옹 강베타 함을 침몰시켰고, 동형함인 U-12함은 1914년 말에 [[쿠르베급 전함]] 3번함 장 바르를 대파시켰다. 일본 해군 [[카바급 구축함]]을 대파시키고 십수 척의 그리스 선박들을 뇌격한 독일제 U-27함의 활약도 돋보였다.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보트 타격전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로 영화 [[사운드 오브 뮤직]]의 모델로 유명한 [[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|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]] 소령이었다. 그는 노획되어 U-14란 이름으로 개칭된 프랑스 해군 잠수함 '퀴리'의 함장이었는데, 1916년부터 그리스 연안과 동지중해에서 수 척의 협상국 수송선들과 민간 선박들을 침몰시켰다. 그의 함선인 U-14함이 본래 프랑스 선박이었던 고로 그는 프랑스 [[삼색기]]를 달아 협상국 함대를 속이고 유유히 봉쇄망을 넘어갔던 것으로도 유명했다. 한편 수상함대는 항구와 전력을 온존하여 협상국에 압박을 주는 것 외에도 아드리아해 봉쇄를 돌파하거나 발칸의 육군 작전을 지원하고, 이탈리아 연안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. 이 중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1915년에 있었다. [[이탈리아]]가 [[삼국 동맹]]을 배신하고 협상국 측에 가담할 것이라는 정황이 명백해지자, 하우스 대장은 이탈리아가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이탈리아 동부 해안의 항구들을 기습하여 파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. 그리고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기 4시간 전 그는 가용한 전체 수상함대에 출항 명령을 내려 기계획된 내용에 따라 이탈리아 연안을 급습했다. 이 기습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[[안코나]]의 철도 시설에 대한 포격은 이탈리아군의 동원 능력을 성공적으로 저해했다. 다만 그들의 주요 목표가 민간 시설들이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. 제국 해군의 포격에 다수의 이탈리아 민간인들도 휘말려 살해되었다. 제국 해군은 [[해군 항공대]] 운영에 있어 선구적인 조직이기도 했다. 미 해군연구소에 따르면 제국 해군 항공대는 아드리아해의 해안선과 오트란토 해협 입구를 돌아다니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 사령부에 실시간으로 적 함대의 위치를 보고했고, 이는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방어전략을 가능케 했다. 또는 몬테네그로 해안을 포격하던 제국 해군의 [[관측반]] 역할을 맡아 포격을 유도하거나 직접 적 함대를 [[폭격]]하기도 했다. 1916년에는 [[프랑스 해군]] 브뤼메르급 잠수함 푸코 함이 제국 해군의 로너 수상기들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는데 이는 최초로 항공기가 함선을 격침에 성공한 케이스다.[* 최초로 항공기가 함선을 '공격'한 케이스는 아니다. 이건 [[일본 해군]]이 최초이며 2년 전인 [[칭다오 전투]]에서 시도했다.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공격받은 함선 역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선이었던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다.] 이외에도 바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 해안을 폭격하기도 했다. 해협 봉쇄선에 대한 돌파 시도도 있었다. 여기서 가장 활약했던 것은 [[타트라급 구축함]]들과 노바라급/헬골란트급 정찰순양함들이었다. 협상국 해군은 주로 [[저인망|트롤어선]]들을 동원해 해협 입구에 기뢰와 대잠망을 깔았는데, 기민하고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했던 제국 해군 구축함대는 이 기뢰지대 근처를 오가며 협상국 어선단에 공격을 가했다. 동원된 민간인들이 다수였던 이 어선들은 이 때마다 격침당하거나 마구 도망쳤고, 목표를 달성한 제국 해군 구축함들은 빠른 속도를 살려 적 증원 함대가 오기 전에 퇴각했다. 그럼 이렇게 엉망이 된 봉쇄망의 틈으로 [[유보트]]들이 나가는 식이었다. [[파일:roads_otranto.jpg]] ▲ [[오트란토 해협 해전]] 당시 기록화. [[호르티 미클로시]] 대령의 함선인 정찰순양함 SMS 노바라 함이 협상국 선단의 함렬을 돌파하는 모습이다. 1917년 하우스 원수가 폐렴으로 급사한 후에는 막시밀리안 녜고반 대장[* [[크로아티아인|크로아티아계]]였다.]이 해군최고사령관직에 올랐고, 그의 지휘 하에 제국 해군은 1917년의 [[오트란토 해협 해전]]에서 협상국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. 오트란토 해협 역시 근본적으로는 상술한 구축함대의 기습 작전이었다. 이때 수상함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[[호르티 미클로시]]였다. 그는 여기서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훗날 [[헝가리 왕국(1920년~1946년)|헝가리]]의 섭정으로 군림하게 된다. 한편 [[의화단 운동]] 진압을 위해 [[청나라]]에 파견되었다가 [[오스트리아-헝가리령 톈진|톈진 조계]] 방위를 위해 남게 된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과 [[해군 육전대]]는 [[칭다오 전투]]에서 [[일본 해군]]에 의해 격파되었다. 카이제린 엘리자베트는 최초로 함상 발진 항공기에 항공 폭격을 당한 함선이기도 했다. 이들은 같이 싸우다 포로가 된 독일 제국 해군 병사들과 함께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전후에 귀국한다. 한편 톈진 조계는 1917년 동맹국에 선전포고한 [[중화민국 북양정부]]의 [[안휘군벌]] 군대가 들어와 접수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